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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왜 한국사가 죽어야

한국이 사는가

 

 

주류 역사학계에는 ‘한국’과 ‘역사학’이 없다

 

20세기 서구를 대표하는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그가 자기 조국의 위대함을 정말 확고하게 믿는다면 맹렬한 국수주의자가 되진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는 상식적인 이치다. 그러나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 대해 “한국인의 가면을 쓴 일본인이다”, “불가사의하다, 30년이 넘도록 근거가 무엇인지 단 한 번도 답을 안 하고 회피한다”, “여기는 아직 총독부 세상이다”, “범죄조직과 같다” 등의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론적 검증과 연구는 고사하고 갖은 패악으로 문헌사료 실증과 고고학적 고증에 입각한 학문적 비판을 ‘재야사학’과 ‘국수주의’로 매도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1차 사료 등의 문헌 고증이나 논거를 갖고 상대를 비판하는 법이 없다. 자신들이 수립한 ‘정설’, 들으면 누구나 좋은 그럴듯한 상식적 총론에 입각해 상대의 견해를 폄훼하고 매장한다. 마치 과학적 수사로 꼼짝없이 궁지에 몰린 범인이 진실과 평화, 화해를 내세우며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은 사례가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는 비일비재하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는 ‘한국’과 ‘역사학’이 없다. 중국의 변방사나 일본의 지방사로 한국사를 보니 ‘한국’이 사라졌다. 역사적 사실에 성실하기는커녕 사실을 외면하거나 사료를 과장하고, 견강부회하거나 억단해서 진실을 매몰시키니 ‘역사학’이 없다. 왜 그럴까? 한국 주류 사학계에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2013년, 광복 68년을 맞이하는 지금까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창안한 식민사관은 단 한 번도 종합적으로 검토하거나 해체되지 못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를 날조한 이들이 한국 주류 역사학계를 장악한 결과다. 국사편찬위원회·동북아역사재단 등 국민 혈세가 매년 수백억 씩 수혈되는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일제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확대하며 재생산한다. 일제 식민사학은 한국 주류 역사학계를 통해 견고하게 유지되며, 일본과 중국의 극우세력에게 유리한 논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왔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언어·종교·교육·예술·젠더·법·행정 등 전 영역에 걸쳐 치명적인 식민주의 해독을 끼쳐 왔다. 식민사관은 식민주의의 정수가 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깊은 패악이 되었다. 여기에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가 식민사관의 저수지 역할을 해온 점을 주목해야 한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출신 이병도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장악해 한국사의 태두로 군림한 결과다. 이병도를 비롯해 김철준·한우근·김원룡·이기백·이기동·노태돈·서영수·송호정 등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주요 학맥으로 연결되면서 조선총독부의 식민사학을 한국사의 정설로 만들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는 절대적인 도그마, 무조건 사수해야 할 ‘부동의 정설’이 있다. 그들은 백 년 동안 금과옥조로 간직한 ‘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문헌사료는 물론 고고학·인류학·사회학·현대과학에서 도출된 새로운 사실과 엄격한 고증을 외면하고 묵살한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고 모든 학문과 사유 또한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요컨대, 조선 교육은 이치를 캐는 자를 되도록 적게 해야 한다”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을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철저하게 현실에 적용했다. ‘정설’을 사수하기 위해 기초적인 질문들을 금기시하고, 다른 시각과 해석을 용인하지 않는다. 정설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역사학은 역사도 학문도 아니다. 이미 답이 다 정해져 있으니 연구할 필요가 없다. 아니, 절대로 연구해서는 안 되는 역사가 한국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설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정설의 논리를 역사학적 방법으로 검토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1차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가 전혀 없이 그들에게는 사활을 건 역사왜곡이 있을 뿐,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역사학의 기본 방법이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역사 철학은 식민사학이라는 외피를 숨기면서, 그 핵심 프레임을 ‘철의 원칙’으로 감싸는 철학鐵學에 불과하다. 주류 역사학계는 그들에게 불리한 사실이 나오면 침묵하거나 해괴한 논리를 개발해 위기를 넘겨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명을 그들은 해괴하게 실천했다. 그리고 학연과 이권으로 ‘철의 법칙’을 사수해왔다. 그들의 학문 권력 카르텔과 화력은 실로 무소불위다.

 

 

‘부동의 정설’에 사활을 거는 그들의 실상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계가 지난 백여 년간 모든 것을 동원해 사수해온 ‘부동의 정설’을 파헤치고, 그 역사적 뿌리와 맥락, 현실과 구조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논증하기 위해 쓴 식민사학 추적 보고서다.

1945년,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로 승계되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가 친일파 손에 청산되면서 한국사 원형과 진실은 철저하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하고 왜곡한 역사는 이른바 ‘실증주의’로 치장됐고, 조선사편수회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과학적 역사학은 ‘신념이 앞선 관념론’, ‘국수주의’로 전락했다. 그렇게 한국사는 죽었다.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를 평생 신조로 삼은 광복군 출신 장준하 선생은 “광복 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월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럽다”는 말을 남겼다. 적반하장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역부족인, 한국현대사에서 통탄할 만한 대목이다.

사실은 해석이 다양할수록 진실에 다가선다. 하지만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사실을 은폐하고 호도함으로써 역사 해석의 다양성 문제를 태생부터 부정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가 일제 식민사관 시각에서 한국사 ‘정설’을 세우고, 정설과 다른 역사관을 이단시하면서 수립한 절대적인 도그마와 닫힌 해석은 진실과 거리가 먼 제국주의 역사학이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규명하는 것은 이 책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실에서 벗어난 논증, 주관적인 해석을 최대한 경계했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이해는 자료만 나열한다고 해서 저절로 증진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시각을 통해 해석된다. 나는 선학들이 일궈온 빛나는 구슬들을 특별한 맥락에서 꿰어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료를 검토했다. 그리고 복잡하고 현란한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이론’이 얼마나 교묘한 기만이자 허술한 언어도단인지 낱낱이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이병도와 서울대 국사학과의 실체는 원로 역사학자 김용섭 교수의 증언에 근거했다. 한편 한국 주류 식민사학계의 실체를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로 ‘단군조선’과 ‘한사군’,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초기 기록 불신론’을 다뤘다. 이 부분에 대한 정설의 논리와 그 근거를 추적하면 그들의 참담한 실상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세 가지 주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한국사의 기본 틀과 맥락이 완전히 바뀐다. 여기에서 일선동조론·만선사관·사대주의론·반도적성격론·당파성론·정체성론이 나왔다. 그리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 한국으로 이어진 한국사 흐름에 대한 기본 시야가 달라진다. 주류 역사학계의 추악한 행태와 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사회적 배경도 지적했다. 이 주제는 최태영·윤내현·이덕일·이종욱·최재석의 저작을 주요 텍스트로 삼았다. 이도상의 《일제의 역사침략 120년》(경인문화사, 2003), 김상태의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책보세, 2012)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한 한국사를 보는 시각에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는 기형적인 현실을 파헤치기 위해 이기백의 역사관과 박노자의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분석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족주의를 역사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더불어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룰 계획인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도 짚어봤다. 일제 식민사관은 교육 시스템을 통해 공고화되었다. 일제의 교육은 자연과 인간, 사물에 대한 주체적인 회의와 사유를 거세했다. 따지지 말고 외워야 하는 주입식 교육이 만들어진 연원이다. 공동체가 모색하고 견지해야 할 가치를 억압해 그 자리에 경쟁·불안·열패감을 내면화하는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은 일제 패망 68년에 접어든 지금도 대한민국을 신음하게 한다.

이 책의 관점과 해석은 선학들이 생을 걸고 이뤄낸 결실들을 또 하나의 시각으로 엮은 텍스트이지, 확고한 진실이나 오류 없는 이론일 수 없다. 정설과 절대적인 진리를 내세우는 행위는 진실에서 가장 먼 태도다. 침묵을 멈추고 치열한 비판을 기대하며 정직한 책임을 다할 생각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자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막연한 희망은 절망을 낳는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가 살면서 한국사는 죽었다. 그러나 대중이 역사의 진실을 알아채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여기에 희망이라는 사실이 있다.

역사와 나라를 잃은 고통은 이름 없는 민중이 온전히 떠안는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혹독한 현실을 살아가는 민중에게 식민주의는 무거운 족쇄 중의 족쇄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사관 척결은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혁신하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기도 하다.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집을 나선 지 한 달 채 못 되었지만

이미 압록강을 건너는 도다.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

호연히 나는 가리라.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1년 1월 27일, 일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노예의 삶을 거부한 그는 만주로 가서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역사서를 쓰고, 무장투쟁을 하다 죽음을 맞았다.

우리는 스스로 사필귀정史必歸正을 이루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물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멈추지 않고 흘러 큰 강에서 만나 바다로 간다. 모두 멈추지 않는 강물이 되어 심원한 역사의 바다에서 만나야 한다.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선혈들을 최후의 승자로 기록해야 할 의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참혹한 실상을 목도하며 충격과 분노를, 역사와 진실에 목숨을 바친 위대한 선각자와 후학들을 보면서 감동과 통찰을 얻을 것이다. 주류 식민사학계는 이른바 ‘현대사 연구금지론’을 내세워 자신의 치부를 은폐하고 선각자들의 역사를 지우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각자들은 나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역사학자가 되고 총을 들었다. 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 밝힌 역사를 우리는 끝까지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후학은 기억을 지키기 위해 역사에 생을 걸었고, 잔혹한 인신공격을 버텨내야 했다.

모두를 위한 역사는 없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인 이 책은 그들에 대한 경의요 헌사다. 기억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끔 한다. 기억이 없는 인간은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어렵다. 역사는 기억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얼마든지 농락되고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 역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자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2013년 1월

이주한


분노한 민중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고

다함께 행동할 때, 새롭고 억누를 수 없는 힘이 생겨날 것이다.

- 하워드 진Howard Zinn



이병도가 살고

한국사가 죽었다

 

 

한 원로 역사학자의 생생한 증언

 

원로 역사학자 김용섭은 2011년 봄, 평생에 걸친 한국사 연구업적을 결산하며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를 발간했다. 그의 저서는 한국사학사상 소중한 학문적 결실과 증언을 담은 역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1960~70년대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겪었던 놀라운 일들을 공개했다. 이제부터 충격적인 증언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1966년, 김용섭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문리대학으로 전속된다. “외풍은 우리가 다 막아줄테니 와서 연구만 하고 자리를 지키면 된다”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김철준·한우근 교수에 의한 반강제 차출이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숭녕 교수는 인사하러 온 김용섭 교수에게 “이 대학의 사정을 잘 모를 테니, 지키는 것이 좋을 사항을 한마디만 이야기하겠다. 사학과는 특히 어려운 과이니 매사에 조심해서 처신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김용섭 교수는 한국사학사 강좌에서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이숭녕 교수가 말한 ‘조심하는 처세’의 원칙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 강좌는 일제하의 잘못된 역사 연구를 성찰·청산하고, 새로운 한국사학을 건설할 것을 목표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사 연구의 발전과정을 비판적으로 진실되게 강의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우리 역사학이 당면한 시대적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중심 대학이고 일제의 경성제국대학을 해체하고 재건한, 국립 서울대학교의 역사학과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일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 강좌에 의욕적으로 임하였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766쪽

 

일제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이 수립한 식민사관을 비판하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들은 김용섭에게 냉담해졌고, 강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느 국사학계 원로 교수는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의 인사를 외면하기까지 했다. 또한 누군가 그의 연구실을 뒤지고 감시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때 일어났던 일들을 김용섭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러한 일들이 있는 동안에 학과에서는 야단이 났다. 아마도 학내·학외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대학과 과에 들어왔을 것이다. 한우근 교수와 김철준 교수는 이 일로, 개별적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이로써 학내외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두 분 교수는 그러한 분위기를 종합 판단한 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되었다. 김 교수 말씀은 두 차례 있었다.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 “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 하시며 질책하셨다. 마치 부하직원이나 제자를 대하듯 나무라셨다. 전자는 경고성 발언이고 후자는 절교성 발언이라고 생각되었다. 한 교수 말씀도 두 차례 있었는데, 연세가 높으신 만큼, 말씀의 논조 방법을 아주 다르게 하셨다. 한번은 두계斗溪 선생이 덴리天理 대학교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오셨는데, 그 대학교에서 한 교수와 나를 초청하니 두 사람이 상의해서 다녀오라고 하셨다며, “김 선생, 같이 갑시다, 김 선생이 간다면 나도 가고, 안 간다면 나도 안 갈래”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계 선생이 덴리 대학교에 가시니, 그 대학교에서 덴리교天理敎의 도복을 입히고, 예배에 참석토록 하였다는군”이라고도 덧붙이셨다. 나는 거기는 아직도 총독부 시대구나 생각하였다. 그래서 “선생님, 저는 차멀미를 많이 해서 여행을 못 합니다. 선생님만 다녀오십시오” 하고 사양하였다. 다른 한 번은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여러 말씀 가운데 핵심이었다. 말씀은 부드러웠지만, 논조는 강하였다. 명령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770~771쪽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 “우리 민족사학 그만하자.”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한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신민족주의 사학이라고 자칭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들의 신민족주의 사학과 김용섭의 민족사학은 어떻게 다른가? 바로 이 부분이 김용섭과 다른 교수들이 부딪힌 갈등의 핵심이다. 김용섭의 민족사학은 간단히 말해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 역사학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들이 주창한 신민족주의 사학은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 역사학이 아니다. 그들의 신민족주의 역사학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일본 극우파 역사학이다.

김용섭의 증언에서 이○○ 선생에 대한 글을 두고 김철준은 “무슨 글을 그렇게 써!”라고 하며 노발대발했다. 여기서 이○○ 선생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국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이병도를 말한다. 김철준과 한우근은 이병도가 아끼는 제자로서 역시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들이 되었다. 김용섭 교수의 이러한 증언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 나라奈良 현 덴리天理 시에 있는 덴리 대학교는 일본의 신도神道 종교단체인 덴리교에서 운영하는 대학이다. 덴리교 본부가 있는 덴리 시는 종교도시이며, 덴리교는 “모든 일본 국민이 한마음으로 덴노天皇의 뜻을 받들어 충성과 효도의 미덕을 발휘한다”는 황국皇國 사관을 신봉한다. 황국은 ‘천황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뜻이다. 일본은 천황제라는 왕권신수설의 나라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 덴노조의 계시를 받들어 영원히 통치한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우리 국체다” 하는 일본의 지배이념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일체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일본의 국가이념은 ‘팔굉일우八紘一宇’다. 즉, 지상 여덟 모퉁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이고, 온 지구를 그 밑에 덮은 다음, 그 지붕 아래에 있는 모든 민족을 일본이 지배한다는 뜻이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창안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국가 통치이념이다. 성스러운 존재인 천황이 있고, 다수의 비천한 존재가 그 대극에서 절대 복종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황국사관은 일본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제국주의적 침략과 타민족에 대한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덴리교는 일제군국주의를 적극 지원했고, 한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간 대표적인 황국신민조직이다. 또한 신도는 천황 숭배를 떠받드는 뿌리요, 기둥이다. 황국사관에 기초한 제국주의로 조선을 멸시하고, 조선 정벌은 불가피하다고 굳힌 주역이 바로 일본 신도였다.

이병도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 일본에서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 대학교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김용섭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이는 당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내부자만 알 수 있는 내밀한 사실이다. 신도는 일본 고유의 민족종교로 출발했으나, 천황교가 되면서 국가신도가 되었다. 신사는 신도의 사원이다. 즉, 신사참배는 천황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민족주의자로 몰아서 치안유지법·보안법·불경죄로 탄압했다. 한민족의 역사와 언어, 전통을 없애 일본에 부속된 인종으로 만들려고 한 일제에게 민족주의자는 치안과 보안을 위협하는 가장 불경한 존재였다. 그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한 수천 명이 투옥되었고, 주기철·조용학·최봉석 등 기독교인 50여 명이 처참하게 순교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민중은 대부분의 신사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가혹한 신사참배에 대한 한민족의 분노와 저항은 거셌다. 그런데 한국사의 태두라는 이병도는 광복 후에도 일본 극우단체의 황국신민 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했다. 일제 침략을 반대했거나 친일행위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위다.

신사참배는 천황의 충실한 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행위다. 일본 천황을 신으로 받들고 모두를 그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침략주의를 찬양하는 의식이다. 누구보다도 신사참배의 의미를 잘 아는 역사학자, 그것도 한국 역사학계 최고 원로가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신도 예식에 참석한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또한 그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들을 덴리 대학교에 보내는 역할도 주도했다. 이병도는 광복 전이나 광복 후에도 극우 일본인의 삶을 살았다. 자신의 극우 숭일崇日 행적을 단 한 번도 뉘우치지 않고 평생을 산 셈이다.  

 

 

잘못된 역사의 정설을 만들다

 

세계에서 한국만큼 자국 역사를 소홀히 여기고, 의미나 흥미를 잃게 하고, 암기해야 할 지겨운 교과서 과목으로 전락시킨 나라도 없다. 자신의 역사를 아는 것보다 영어 단어 하나 아는 것을 훨씬 소중하게 여기는 풍토다. 역사 전공자도 마찬가지다. “내 전공은 한국사가 아니다”, “한국사를 전공하지만 시대가 다르다, 주제가 다르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지식인들은 “나는 한국사를 잘 모른다”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지식은 스스로를 아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모든 인간은 관계의 존재, 역사의 존재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를 모르면 자신을 알 수 없고,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데도, 그들은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

“답답하다, 옹색하다, 무미건조하다, 재미없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해하기 어렵다, 지겹다, 꼭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한국사를 떠올릴 때 일반적으로 드는 생각일 것이다. 역사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에 푹 빠져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야기 속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데 얽혀 있으며, 삶을 풍성하게 하고 깊은 공감과 감동, 깨달음을 준다. 인간은 이야기로 사는 존재다. 이야기는 기억이며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이야기 없는 인간은 없으며 거기에 자신과 조상, 민족과 공동체가 있어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런데 한국사에는 이야기가 없고 죽은 단어들이 박제되어 있다. 단편적인 사실이 앞뒤 연결 없이 조각조각 나열되어 있다. 이렇게 한국사는 죽어 있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그랬을까? 한국사만 유독 태생적으로 이런 성격을 가졌을 리 없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점과 계기, 그리고 여기에 개입한 누군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일제 식민사관이라는 큰 독사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한국사는 일제 식민사관으로 인해 원형을 잃고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역사학계의 주류냐, 비주류냐”, “어떤 역사관을 갖고 있느냐”를 떠나서 식민사관 문제는 한국사 최대의 관건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마치 폐쇄된 공간에서 범죄가 발생했는데, 모두가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한다고 소리만 치는 상황과도 같다. 살해당한 사람은 있는데, 살해한 사람은 없다. 범죄는 계속되는데, 범인의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삶은 영위될 수 없다.

식민사관 논란은 단순히 역사학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관은 그 시대의 세계관을 함축한 것이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젠더·교육·법·예술 등 사회 전 영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가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지는 않겠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없다. 식민사관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는 식민사관을 추구한다”, “나는 식민사학자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당연히 그렇게 말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백여 년 전 식민사관을 창안한 일제 식민사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정당성이 없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를 갖추게 마련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추악한 고문과 테러, 전쟁을 자행하는 세력도 ‘평화’와 ‘인권’을 앞세우지, ‘폭력’과 ‘살상’을 앞세우는 경우는 없다.

어떤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사적 시각이다. 그중에서도 “누가, 왜, 어떻게”라는 의문이 핵심이다. 한국사를 보는 관점과 이론을 과연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 끝까지 추적하면 식민사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가 외면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역사 분석의 가장 유력한 문제인식은 “누가”다. 그리고 “왜,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등의 질문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실체에 접근한다.

어떤 이론이든 그 이론이 발생한 사회적 맥락과 배경이 있다. 더구나 역사이론은 특정한 세계관과 역사관에 바로 직결되어 생산된다. 따라서 사론史論이 처음 발생했던 시기의 사회적 배경과 맥락, 사론 생산자들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분석하면 그 사론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입으로는 모두 “식민사관을 청산하자”고 외치지만 식민사관이 견고한 까닭이 있다. 그로부터 이득을 얻고, 자신의 현실과 입지를 정당화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이런 질문을 금기시한다. “왜 그럴까?” 한국사가 태생부터 식민사관이거나 어느 날 갑자기 식민사관이 되었을 리 없는데도 말이다. 분명 누군가 식민사관을 창안하고 재생산해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호도하거나 은폐해서 지속적으로 이득을 누리는 세력은 누구일까?

한국사를 보는 시각과 이론에는 이른바 ‘정설’이란 것이 있다.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고 현재의 시각에서 늘 새롭게 쓰이는 것이 역사인데,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정설이란 것을 만들어, 다른 해석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이단시한다. 역사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무시하거나 은폐하고 왜곡하는 풍토가 뿌리 깊다. 그 뿌리를 캐보면 결국 한국사의 태두 이병도가 등장한다. 한국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연구하듯이, 한국역사학을 분석하려면 먼저 이병도를 알아야 한다.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출신들은 스승 이병도의 학설을 정설로 삼았고, 이병도는 자신의 스승들, 즉 대표적인 일제 어용학자들의 견해를 정설로 받들었기 때문이다.

이병도가 어떤 인물이고 그의 스승들이 주창한 한국사관이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파헤치면, 유령이 되어버린 식민사관도 더 이상 몸을 숨기기 어렵게 된다. 물론 그들이 순수하게 학구적인 태도로 한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견해가 그렇다. 같은 사실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있는 것이니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까지 부정하거나 곡해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일 뿐이라는 점을 우선 밝혀둔다.

 

 

식민사관을 만든 핵심 인물들

 

한편 반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명의 행적을 기록한 학술서적을 발간했는데, 교육·학술분야 첫 번째 인물로 이병도를 선정했다. 이병도가 역사학계는 물론 한국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력이 실로 막대하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사관을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수사관보修史官補로 활약했다. 먼저 그의 이력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남.

•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입학.

• 1916년~19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사학과 및 사회학과 졸업. 일선동화론을 주창한 와세다 대학교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에게 영향을 받아 한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함. 황국사관의 권위자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게 역사 수업을 받음.

•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가 되어 한국사 연구 시작. 식민사관 총서 《조선사》 편찬에 적극 참여.

• 1934년: 진단학회를 창설하고 대표를 맡음.

• 1945~62년: 광복을 맞아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취임함. 이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박물관장, 대학원장과 학술원·시사편찬위원회·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역임. 진단학회의 친일파 제명운동대상자가 되고, 반민족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으로 위축되기도 하나, 이승만의 친일파 우대 정책과 6·25 이후 반공국시에 편승하면서 한국 역사학계 최고 원로가 됨.

• 1954년: 진단학회 이사장으로 복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

• 1955~82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역임.

• 1960년: 문교부 장관, 학술원 원장을 역임.

• 1961년: 대학교수 정년제 실시로 서울대학교에서 퇴임한 후, 국민대학교 학장, 성균관대학교 교수 및 교육·문화 분야의 단체이사를 역임.

• 1970년: 박정희 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을 역임.

•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국정자문위원을 역임.

• 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문화상, 5·16 민족상을 받음.

 

여기서 그가 맡았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외에 주목해야 할 자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대한민국 학술원 원장이라는 자리다. 이는 대한민국 학술원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제 극우파 사관을 신봉하는 사람이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일하고, 문교부 장관과 학술원 원장을 역임했다. 제대로 된 학문이 있을 수 없는 구조다.

이병도는 대표적인 노론老論 명가 출신으로 마지막 노론 당수였던 이완용의 손자뻘 일가친척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해 조선인 최초로 대학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와세다 대학교의 요시다 도고가 주창한 일선동화론 등에 영향을 받아 한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가장 치밀한 황국사관 이론가로 평가받는 쓰다 소키치를 만나 역사 전공을 결심했고, 그에게 본격적으로 역사 수업을 받았다. 또한 쓰다 소키치의 소개로 도쿄 제국대학 이케우치 히로시에게 개인적인 역사 지도를 받았다.

이병도는 이케우치 히로시의 권유와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이 되어 그곳의 핵심인물인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한국 고고학계의 태두인 김원룡의 스승) 등과 함께 일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행적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20년 동안 이어졌다. 이병도의 스승들은 모두 황국사관에 충실한 신민으로서, 일제 식민사관을 창안하고 체계화한 대표적인 일제 어용학자들이다. 즉, 그들이 식민사관의 핵심이론을 주창한 주역들이었다.

이병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쓰다 소키치를 비롯해 이케우치 히로시, 이나바 이와키치는 도쿄 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에게 지도를 받았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당시 황국사관으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다. 이들이 만든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한국을 만주에 부속된 역사로 봄으로써 한국 침략을 합리화한 이론)에 그는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병도는 1975년 이기백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자신의 스승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쓰다 씨가 《조선역사지리》를 발표한 후, 시라토리를 위시한 이나바, 마쓰이松井등이 만주역사지리를 연구했지요. 이때 《조선역사지리》가 2권, 《만주역사지리》가 2권 나왔고, 그다음 보고서인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가 나왔지요. 이 책은 주로 이케우치가 편집책임을 맡고 했기 때문에 그의 논문들이 많이 발표되었는데, 아마 전쟁 전까지 계속 나와서 16권인가 되지요.

그 영향을 나도 많이 받았어요. 특히 도쿄 대의 이케우치 박사는 나를 위하여 일부러 자기가 저술한 책자, 논문 등을 보내주곤 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쿄토 대 교수로 있으면서 경성제국대학에 오래 있었던 이마니시 박사와도 퍽 친하게 지냈어요. 그분은 노력가였고 세밀한 이었지만 문장이나 창의력에 있어서는 이케우치 씨에게는 따르지 못했지요.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면에서는 이케우치 씨가 월등 나았지요. 이케우치의 나이는 이마니시와 한두 살 차이로 거의 동년배로 볼 수 있었지만, 한국사 연구에서는 이마니시가 훨씬 앞섰지요. 이케우치는 가끔 이마니시를 비평하면서 그가 노력가이기는 하지만 그의 저술을 읽어 보면 무어가 무엇인지 통 요령을 알 수가 없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좌우간 이마니시도 학술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애를 썼지요. 이케우치는 실증학파로 유명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좀 더 날카롭게 올바르게 한국사를 다루었지만 역시 결점은 있었어. 그 자신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자기가 한창 세밀하게 논문을 쓸 때 어떤 때는 자신도 무엇을 썼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더군. 그래서 논리적으로 한 귀퉁이가 틀려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약점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 221~223쪽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를 만났는가’다. 누구를 언제, 어떻게 만났는가에 따라 삶이 바뀐다. 이병도는 스승들, 즉 식민사학자들을 “노력가였고 세밀한”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학술적으로 애를 쓴” “실증학파로 유명했던” “좀 더 날카롭고 올바르게 한국사를 다루었던” 인물들로 높게 평가했다. 이병도의 이런 평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이면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은 쓰다 소키치다. 이병도는 쓰다 소키치를 통해 역사를 전공하기로 결심했고, 그에게 역사를 배웠으며, 그를 가장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니 일본뿐 아니라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존경받는다. 그러나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를 “일본 고대 사학자 가운데 가장 일본 고대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지능적으로 조작하여 한국사 왜곡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사회학자 최재석), “한국의 역사를 날조한 장본인이자 한국의 역사를 정복한 출발자”(역사학자 이종욱)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이병도의 식민사학은 상당 부분 쓰다 소키치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그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병도를 위해 일부러 자신이 저술한 책자, 논문 등을 보내주던 이케우치 히로시는 “한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출발했다”는 침략논리를 체계화하면서 한국 역사서 기록을 모두 조작했고, 전설로 왜곡해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그의 이론은 후에 고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는 도쿄 제국대학 교수이면서도 쓰다 소키치의 소개로 이병도를 지도했으며, 조선사편수회에 그를 추천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이병도의 증언을 다시 곱씹을 필요가 있다. “한창 세밀하게 논문을 쓸 때 어떤 때는 자신도 무엇을 썼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더군. 그래서 논리적으로 한 귀퉁이가 틀리면 전체가 무너지는 약점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일제가 내세운 실증사학의 성격, 황국사관에 충실했던 어용학자들의 근본적인 한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말은 이병도 자신에게 돌리면 더욱 정확한 말이다. “나는 한창 세밀하게 논문을 쓸 때 어떤 때는 나도 무엇을 썼는지 잘 모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논리적으로 한 귀퉁이가 틀리면 전체가 무너지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이다.

이마니시 류는 조선사편수회 핵심인물로 맹활약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자주 언급될 것이다. 그는 한국사의 출발인 단군조선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말살한 주역이다. 한국은 초기에는 중국의 식민지였으나 삼국시대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다고 봤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그를 보좌하며 본격적인 한국사 왜곡에 나서기 시작한다.

한국사를 만주에 부속된 비주체적인 역사로 보는 만선사관을 가장 강력하게 주창한 사람은 이나바 이와키치였다. 그는 한국의 정치·경제·문화는 자주성과 독자성이 없다면서 고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그 역시 이병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82년, 한 대담에서 이병도는 “대학 졸업 후 어떤 방법으로 논문을 쓰고 발표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대학 3학년 때의 강사(그 후에는 교수)인 쓰다 소키치와 또 그의 친구인 이케우치 히로시(도쿄 대학교 조선사 교수)의 사랑을 받아 졸업 후에도 이 두 분이 자신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보내주어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원래 남의 논문이나 저서를 많이 보아야 연구방법이나 학식의 향상을 보게 되는데, 그 당시 일본 학계의 최첨단을 걷는 이 분들의 논문이나 저서들을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인이지만 매우 존경할 만한 인격자였고, 그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만큼 날카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때 중앙학교(현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다가 이케우치 씨의 추천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일시 취직해 일본인 학자들과 많이 접촉을 하였고, 그 후부터 비로소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 225쪽

 

자신을 향한 일본 학자들의 사랑이 이병도는 너무 자랑스럽다. 그들이 왜 식민지 청년을 그렇게 사랑했을지 의문을 갖지도 않았다. 자신 같은 인물을 사랑해줘서 그저 감격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을 것이다. 이병도는 자신의 말대로 당시 일본 학계의 최첨단을 걷는 두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그들에게서 역사를 배웠다. “당시 일본 학계의 최첨단”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재에도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은 일왕을 학문적으로 다루거나 거론하는 것을 피한다. 목숨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일왕을 건드리는 것은 금기다. 천황을 신격화하기 위해 신도라는 원시신앙을 동원한 이래 천황은 일본을 통합하는 상징이자 유일신이 되었다. 천황제국주의에 입각해 침략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황국사관에 충성하지 않는 이가 일본 학계의 최첨단을 걸을 수는 없다.

조선총독부는 이 땅을 점령하고 보니 통치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단군에서 시작하는 자국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백제 등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해주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국사를 식민지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변조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서술하기 시작했다. 이런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이후 《조선사》 편찬 계획을 세워 준비해오다가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조선총독부 직할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등의 일제 어용학자들이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구로이타 가쓰미는 황국사관의 기초를 다져 침략 논리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쓰다 소키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기초를 세웠고, 이마니시 류와 함께 고대 조선과 단군 관련 기록을 샅샅이 강탈해 없애버린 인물이다. 여기서 이병도는 고려 이전의 고대사 연구를 맡았다. 조선총독부가 침략을 합리화하고 한국사를 말살하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고대사다.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중국 식민정권인 한사군이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세웠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병도가 식민사학의 전사로 나서며 한국사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하고, 한국 상고사 연구에 매진한 최태영 박사의 증언이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 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도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 박사의 기존 학설에만 매달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세종실록世宗實錄》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 년 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 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 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 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화일보》, 2000년 1월 3일

 

이승만 정권 때부터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증언이다. 일본인들이 식민사학을 전파했지만 크게 먹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해방 후 한국인 식민사학자들이 신민족주의 사학이라고 위장하면서 일제 극우파 사관을 전파하자 먹혀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설마 한국 역사학자들이 일본인 못지않게 한국사를 왜곡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군조선을 부정하게 된 것은 이병도가 한국사의 태두로 등장하는 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최태영이 말했듯이 그의 제자들은 이병도의 단군부정학설에만 매달렸다.

 

이병도의 국사 연구는 고대사와 고려시대 풍수지리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 세 분야로 크게 압축된다. 이 중에서 가장 역작으로 꼽히는 것은 고대사 연구로서 학계에 미친 영향도 가장 크다. 이병도의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한사군의 위치와 삼한 문제에 대한 일련의 연구다. 〔…〕 이병도의 한사군 연구는 당시 신채호·정인보 등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한사군의 허구성을 주장하면서 그 위치를 만주지방에 비정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며, 결과적으로 한사군의 중심지가 한반도에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어쨌든 그의 학설은 오늘까지도 우리 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동걸 외 엮음,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권, 창작과비평사, 1994, 262쪽

 

이병도는 고대사 중에서도 한사군의 위치와 삼한 문제에 가장 큰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군조선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한국사는 중국 식민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고 서술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만주로 봤지만, 그는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식민정권인 한사군 이전의 고조선 역사를 미개사회로 규정했다.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견해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주장이었다. 이병도의 학설은 한마디로 조선사편수회 학설의 복사판이었다.

광복 후,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이병도와 그의 일본인 스승들은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역사학을 추구한 반면,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그렇지 못했다고 격하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1차 사료적 근거가 박약한 것은 식민사학자들이었고, 1차 사료적 근거가 충분했던 것이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다. 일제는 실증주의를 내세웠지만, 정작 자신에게 불리한 1차 사료는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날조했다. 반면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1차 사료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일제 어용학자와 독립운동가는 세계관과 역사관, 학문관과 학문방법에서 근본적으로 대립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2012년 8월 27일,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올해 85세인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는 “나 이상의 증거가 어딨나? 그들이 사람인가?”라고 분노했다.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로 끌려갔던 장본인이 온몸으로 입증하는데, 일본의 극우파 총리는 문서가 없으면 위안부는 없는 것이라고 우겨댄다. 내가 폭행당했다고 주장하는데, 폭행당했다는 문서가 없으면 사실이 아니라는 격이다.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이 딱 이와 같았다. 그 추종자인 한국 주류 역사학계도 마찬가지다.

 

 

권위적인 스승이 되길 자처하다

 

누구에게 처음 역사를 배우고 영향을 받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역사의식과 역사관이 형성된다. 이때 굳어진 역사관은 웬만해서 변하지 않는다. 이병도는 일제 어용학자들에게 역사를 배웠고, 그것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그는 스승들의 역사의식과 역사관은 물론, 학문태도와 방법, 그들의 성향과 성품까지 따르려고 했다.

1984년, 한 인터뷰에서 “해방 후 우리 역사학계의 연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이병도의 답변이다.

 

뭐 내가 주제넘게 나설 일은 아닙니다. 내 제자인 이기백, 한우근, 김철준 등이 잘하고 있어요. 물론 그들 나름의 입장에서 잘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은 내 학설을 좇기도 하고 안 좇기도 하는데 내 개인 생각에서는 내 학설을 안 좇는 데는 좀 미흡한 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연구가 심각하게 깊이 파고들면 결국 내 소리인데, 인습에 말려 재래설在來說을 따라가는 데는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진한 문제인데 내가 다 밝혀 놓았는데 굳이 재래설을 들먹인다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죠.

-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 271쪽

 

“내가 다 밝혀 놓았으니 그저 따르면 된다”는 권위적인 모습이 역력하다. 조금이라도 내 학설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안하무인식 태도다. “내 학설을 안 좇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연구가 깊어지면 결국 내가 한 말들이니 다른 해석은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학문은 열려 있어야 하고 다양한 학설이 공존하고 충돌해야 발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문이 아니다.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빠른 진보를 보이는 듯해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처럼 일제 식민지배체제와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다양성을 추구했다. 일제 식민지배에 충성했던 사람들은 이병도처럼 획일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어떤 학설이든 절대화되면 진리에서 멀어진다.

이병도의 제자들도 스승의 견해를 정설로 떠받들었다. 그러다 정설을 사수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불가피하게 각론에서 몇 마디 보탰다. 이병도는 그것도 못마땅했다. 일제 식민사학의 학풍이 그러했다. 황국사관은 절대적인 역사관이자 폐쇄적인 도그마였다. 천황을 정점으로 한 상명하복上命下服 체제에서 스승의 학설은 정설이고 불가침의 영역이다. 지금도 한국의 교수와 제자 관계는 일제 때 만들어진 풍토에 따라 주인과 노예의식이 여전하다. 그런데 그 노예가 주인이 되면 똑같다. 사회 다른 분야에 비해 학문이 퇴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병도는 자신의 고대사 연구가 조금이라도 시비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시비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난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교과서에도 내 학설을 좇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일제시대 총독부 관리들이 독립사상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그렇게 탄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심하고 고대사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내 나름대로 선인들이 해결하지 못한 고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 277쪽

 

이 말은 중요한 대목이다. 첫째, 시비는 말도 안 된다. 둘째, 교과서가 내 학설을 좇고 있다. 셋째, 총독부는 독립사상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그렇게 탄압하지 않아 안심하고 고대사를 연구했다.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들의 지침에 따라 한국사를 연구했던 이병도에게 역사 탄압은 남의 일, 즉 독립운동가의 일일 뿐이었다. 총독부에게 이병도는 그저 사랑스럽고 안심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반면 조선총독부와 대척점에 섰던 단재 신채호는 당시 어떻게 역사를 연구했는지 살펴보자. 1931년 11월 16일, 중국 여순旅顺 관동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신채호를 면회한 《조선일보》 신영우 기자와 나눈 대화다.

 

“옥중에서도 다소간 책자를 보실 수 있습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책을 봅니다. 노역에 종사하느라 시간은 없지만, 한 10분씩 쉬는 동안에 될 수 있는 대로 귀중한 시간을 그대로 보내기 아까워서 조금씩이라도 책 보는 데 힘씁니다.”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노력하여 저작한 역사가 《조선일보》 지상에 매일 계속 발표되고 있음을 아십니까?”

“네, 알기는 알았습니다만, 그 발표를 중지시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비록 내가 지금까지 비록 큰 노력을 하여서 쓴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단정적 연구가 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10년의 고역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다시 정정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이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한 번 발표되자 조선에서는 큰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 554쪽

 

“선생님의 글은 게재되자마자 조선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증언처럼 조선인은 단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봤고, 열렬히 지지했다. 이어서 신영우 기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최근 수개월 전부터 우리 신문지상에 그가 30여 년간의 깊은 연구와, 세밀하고 넓은 조사와, 꾸준하고 절륜한 노력을 경주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가 비로소 대중적으로 계속 발표, 소개됨에 따라 그 심오한 내용, 풍부한 예증, 정확한 사실, 그 단아하고 첨예하고 웅혼한 필치가 과연 조선 역사의 대가로서 추앙받던 까닭을 바로 나타내 보이면서 수십 만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고 있다.

 

심오한 연구, 정연한 체계, 투철한 관찰, 풍부한 예증은 현대의 사가史家로서 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바이며, 절대적이고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재는 결코 그것으로써 조금이라도 자만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불만족을 느끼고, 다시 완벽을 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귀중한 태도이며, 학자로서 얼마나 경건한 태도인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신영우 기자에게 역사 문헌과 에스페란토어 책과 사전을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한 단재 신채호는 결국 1936년 2월 21일,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그에 비해 이병도는 “혹시 선생님 사관에 대해 ‘식민지 사관’ 운운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식민지 사관이요? 난 개의치 않지만 나도 따진다면 민족사관입니다. 내 자찬인지 모르나 내 공로가 커요. 난 오로지 역사가의 양심대로 연구를 해왔습니다.(1984년 대담)

-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 275쪽

 

이병도가 말한 민족은 어떤 민족인지, 역사가의 양심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일본 근대사학을 대표하는 최고 인물로 꼽히는 사람이 쓰다 소키치다. 그는 황국사관을 정밀하게 체계화한 핵심인물이다. 이병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고, 식민사관 정립에 지대한 역할을 한 그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쓰다 사학’ 또는 ‘쓰다 사상사학’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일본과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한국에 신채호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쓰다 소키치가 있었다. 그러나 역사관과 사상, 학문방법이 완전히 달랐고, 삶도 180도 달랐다. 한 사람은 진실을 죽이는 길을 택했고, 한 사람은 진실을 지키려다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도 쓰다 소키치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 최고의 근대적 역사학자라 칭송하고, 단재는 독립이라는 민족감정이 앞서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못한 편벽한 인물로 폄하한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 고대사학자 중 가장 지능적으로 일본사와 한국사를 조작하고 날조한 황국사관의 거물이다. 쓰다 소키치와 신채호에 대한 김용섭의 평가를 보자.

 

일제하에서는 최량最良의 역사가였다고 하는 쓰다 소키치조차도, 해방 후에 한민족을 논하되, “한민족의 민족성은 강자에 대해서는 굴종적이고 약자에 대해서는 그 반대이며, 거기서 그들의 부리비도不理非道의 악질적인 행동이 나왔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게 된 것도, 반도인의 그러한 심리가 악질 행동으로 나타난 데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거의 이성을 잃은 발언을 하여, 뜻있는 사가史家들을 개탄케 하였다. 그들의 한국인관에 변함이 없는데, 그 한국사관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528~529쪽

 

쓰다 소키치는 한국인을 이성과 도덕이 없는 악질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규정했다. 김용섭은 쓰다 소키치를 거의 이성을 잃은 인물로 봤지만, 지금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그를 최고의 역사학자로 칭송한다. 신채호에 대한 평가도 한번 살펴보자.

 

박은식과 같은 시기에 그의 역사학을 이어서, 그의 역사의식에서 볼 수 있었던 한계를 극복하고, 이론적으로 우리의 근대 역사학을 완성시킨 학자는 신채호였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은 그 역사의식에서 중세체제의 지양과 근대사회의 건설이라는 전체 조건이 필요한 것인데, 박은식의 역사학에선 이러한 점에서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신채호의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점이 극복되면서,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우리 역사학의 이론체계가 체계화된 것이었다. 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역사학으로서 실학과 역사학, 그리고 개혁기 역사학의 비판적 계승과 박은식의 역사학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서, 우리 역사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그것을 근대 역사학으로 훌륭하게 성취시킨 것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613~614쪽

 

(신채호)의 사학사적인 비판은 철저하여서, 최선의 사서로 알려진 사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 그의 역사학은 사료수집에서나, 역사서술의 방법 및 입장에서, 그리고 역사의 주체 등이 모두 바르게 세워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620~621쪽

 

신채호는 한국 전통 역사학을 계승하면서도 근대 역사학의 이론 체계를 확립했다. 쓰다 소키치는 황국사관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설득을 높이기 위해 《일본서기》 앞부분을 허구로 봤다. 그런데도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그를 한국사 근대화의 교주로 떠받든다.

쓰다 소키치에 대한 역사학자 이종욱의 평가도 한번 살펴보자.

 

우리 역사가들은 쓰다 소키치를 양심적인 연구자로 보며 대단한 역사가로 인정해 그가 날조한 역사를 따랐다. 그와 달리 필자가 그를 한국사에 대한 식민사학을 발명한 장본인이라고 하면 문제가 될까? 그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신라사, 나아가 한국사 자체를 위하여 《삼국사기》를 사료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 일본의 역사를 발명하면서 걸림돌이 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 부분의 기록이 모두 허구라고 왜곡하여 주장한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당시 일본사학이 발명하고 그가 신봉한 임나일본부설을 지키기 위해 〈신라본기〉를 허구로 몰아갔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쓰다 소키치의 악랄함을 볼 수 있다. 쓰다 소키치는 한국의 역사를 날조한 장본인이자 한국의 역사를 정복한 출발자이다.

-이종욱, 《민족인가, 국가인가》, 소나무, 2006, 54쪽

 

이종욱은 “역사에 대한 쓰다 소키치의 악랄함을 볼 수” 있었지만 한국 주류 역사학자들은 그를 마치 역사의 신처럼 떠받든다. 또한 “한국의 역사를 날조한 장본인이자 한국 역사를 정복한 출발자”를 교주로 떠받든다.

이병도가 존경하는 그의 위대한 스승들의 학문 수준을 신채호는 우습게 봤다. 당시 일제 최고 석학을 평가한 신채호의 말이다.

 

아, 슬프다. 조선과 중국, 일본 등 동양 문헌에 대한 큰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충분히 만족할 만한 도서관은 없다고 해도 그러나 동양에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조선의 소유가 거의 모두 그곳에 동양에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조선의 소유가 거의 모두 그곳에 저장되어 있으며, 또 서적의 구입 및 열람과 각종 사료의 수집이 우리처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는 가난한 서생들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고, 게다가 신사학新史學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면서도, 지금까지 동양학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자가 시라토리 구라기치라 하지만, 그가 저술한 신라사를 보면, 사료를 배열하고 정리하는 데 새로운 방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의 새로운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신채호,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67~68쪽

 

시라토리 구라기치는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한국사는 만주부속사라고 주장했던 이른바 ‘만선사관’ 주창자이자,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의 스승이다. “지금까지 동양학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는 단재의 분석은 지금도 유효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식민사학자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현재 주류 역사학자로 있는 상황에서 큰 학자가 나오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단재의 역사학 수준을 따라갈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단재는 북경 망명 시절, 《북경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편집자 임의로 ‘어조사 의’ 자를 뺐다는 이유로 기고를 거부할 정도로 연구와 발표에 엄격했다. 이미 발표한 연구결과도 미진한 부분이 발견되면 철회 의사를 밝혔다. 이런 사례들은 광복 후 친일파들에 의해 단재를 고루하고 편벽한 인물로 각색하는 데 활용되었지만, 철저하고 엄격한 그의 학문태도와 사상을 보여주는 일화였을 뿐이다. 어떤 글과 말, 행위는 이렇듯 전체적인 시각과 맥락에서 살피지 않으면 쉽게 왜곡된다. 성균관 최고의 유학자가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열린 사람이었는지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김삼웅은 《단재 신채호 평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단재 평전을 쓰면서 ‘고민’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전評傳’이라면 생애의 정사곡직正邪曲直과 후대의 평가를 공정하게 쓰고, 사생활이나 스캔들까지 기록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그에게서는 어느 구석에서도 ‘흠결’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김삼웅, 《단재 신채호 평전》, 시대의 창, 2005, 7쪽

 

한국 사학계가 단재의 고대사만 제대로 연구하고 고증에 충실해왔다면 감히 중국이 요즘과 같이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의 망설을 들고 나오지는 못하였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단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과 10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진정한 사가의 진면목을 보인다.

-김삼웅, 《단재 신채호 평전》, 시대의 창, 2005, 167쪽

 

그런데 한국 주류 식민사학자들은 단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들과 단재는 양립할 수 없다.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본다. 즉, 일본 극우파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본다. 그러니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아래의 글은 쓰다 소키치에 대한 역사학자 이도상의 평가다.

 

한국고대사는 일본고대사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발전되어왔지만, 일본고대사는 한국고대사와 분리하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데 일본 역사학자들의 고민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역사를 논하지 않고는 일본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일본 쪽에서 보는 한국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일본인에 의한 한국고대사 연구는 바로 일본고대사 연구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일본고대사는 한국고대사와 밀접하게 서로 맞물려 있으면서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둘 중에서 어느 한쪽이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중 일본고대사 쪽이 편찬 동기나 연대, 사실기록,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접합된 연구 성향 면에서 조작 개연성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임에도 쓰다 소키치는 이를 외면하였다.

-이도상, 《일제의 역사침략 120년》, 경인문화사, 2003, 89쪽

 

남의 나라를 침략하려니 거짓이 필요하다. 나를 위해 네가 죽어야 하는 것이 침략주의다. 내 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남의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야 한다. 결국 둘 다 거짓이 된다. 쓰다 소키치는 황국을 위해, 한국 침략을 위해 역사를 공부한 황국신민이었다. 그의 말대로 부리부도한 악질 행동을 한국에 가한 인물이었다.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한 일본 학계가 쓰다 소키치를 일본이 낳은 가장 위대한 학자라고 칭송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한국고대사를 근대적인 실증사학으로 연구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는 한국 역사학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쓰다 소키치가 《일본서기日本書紀》 앞부분을 비판한 것은 전반적인 역사왜곡을 위한 부분적인 손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허구적인 부분을 손보면서 황국사관의 설득력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이들에게 순수학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석학들이 쓴 잡지(이시모타 쇼石母田正가 1963년 《역사평론》에 실은 글)를 예로 들며 김용섭은 일본인 역사가의 말을 소개한다.

 

여기에 집필한 사람들은 현대 일본의 석학 대가들이었고, 일본 관학 아카데미즘의 학풍을 수립한 실증사가들이었다. 그들의 논고는 오늘날 일본인 역사가 이시모타 쇼에 의해서 이미 지적되고 있듯이, “농담濃淡의 차는 있었지만, 어느 것이나 조선이라고 하는 독립국가를 멸망시켜 영토를 뺏고, 압박 민족으로서 조선인을 예속시키려고 하는 정당성을, 역사학에 의해서 기초지으려는 의도와 연결되고 있었다. 일본의 국내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던 학자들도, 중국이나 조선 문제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이고 경박한 사가史家가 되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지배민족의 역사학의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507쪽

 

이시모타 쇼는 “비교적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던 학자들도, 중국이나 조선 문제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이고 경박한 사가가 되고 있었다. 제국주의 지배민족의 역사학의 기본적인 특징이었다”라고 말했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순수한 행위가 정치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물며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전쟁 중에는 같은 편 아니면 적이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추앙받는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다시 태어나면 과학자가 되지 않고, 시계수리공이 되고 싶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과학이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시계수리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만, 과학은 자칫하면 원래 의도와는 달리 인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시대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처음부터 자국의 침략을 합리화하고 옹호했다. 그것을 지금도 한국 주류 식민사학자들은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일제는 박은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사학자들, 특히 박은식을 넘어 역사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단재 신채호의 근대적인 역사학에 위기를 느꼈다. 단재의 역사학은 한국 민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19년 3·1 민중항쟁은 일제에게 두려움을 안겼다. 민족주의 역사학이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조선사 인멸작업에 착수했고, 1915년부터는 조선사 편찬사업을 시작했으며, 1919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해 1922년~1938년에 걸쳐 거대한 예산을 들여 《조선사》 37권을 발행했다. 이렇게 탄생한 조선총독부의 《조선사》는 한국사를 근원적으로 파괴한 원형이 되었다.

여기서 이병도가 참여한 《조선사》에 대한 김용섭의 평가를 보자.

 

《조선사》는 단순한 통사가 아니고 하나의 사료집이었다. 그것도 조선의 전통적인 사서 체계를 따라 편년체 사서로 편찬한 것이다. 일제시기에는 논문이나 단행본을 저술하는데, 왕왕 이 책을 자료로서 인용하였고, 기본 사료에 애로를 느끼는 사람은 지금도 이것을 사료로서 이용한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사료를 볼 수 없는 입장에서, 이것만이 보급되어 있다면, 이것은 유일한 자료가 될 것이다. 식민지 당국이나 조선사편수회의 일본인 고문 위원들은 이런 점에 착안하였다.

그리하여 외관상으로는,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편찬한 것으로 되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취사선택이 있었다. 그들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은 되도록 많이 채록하고, 한국사의 본질적인 문제나 민족문제, 그리고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청일전쟁 이후의 그들의 침략사는 아예 다루지 않았다. 《조선사》가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기여하는 바는 실로 크고 원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한국사를 서술한다면, 그것은 한국사의 주체성·발전성을 살리는 역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 당국에서 서술·편찬하는 역사가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역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 점은 연구논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사편수회가 발족하면서, 그 회의 직원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논문집 《조선사학》에서는, “우리가 조선사를 연구하는 것은, 첫째 국사(일본사)를 위해서이고, 이미 국사의 일부가 된 조선사를 위해서이고, 또 동양사 연구상에서 볼 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한국사 연구와 서술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510~511쪽

 

김용섭은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한국사를 서술한다면, 그것은 한국사의 주체성·발전성을 살리는 역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주류 식민사학자들은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서술하고 있다. “식민지 당국에서 서술·편찬하는 역사가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역사가 될 수는 없었다”는 당연한 언명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을 영원히 식민지배하려는 천황제국주의를 위해 역사를 편찬했다는 평이다.

이는 정확한 지적이다. 이렇듯 어떤 주제를 다루려면 전체적인 시각에서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밝히며 분석해야 한다.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거꾸로 단편적인 사실만 나열하거나 불리한 사실은 거론하지 않거나 곡해하는 식으로 기존 식민사학설을 유지해나간다. 지리산의 산세를 논하는 자리에서 나무와 물을 보니 설악산이 틀림없다고 우기는 격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 편찬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를 《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만약 이와 같은 새로운 사서를 편찬하지 않는다면 조선인은 함부로 합병과 관련이 없는 사서史書, 또는 합병을 저주하는 서적을 읽을 뿐이며, 이리하여 풀이 무성하여지듯이 몇 해를 지나면 언제나 눈앞에 보던 습성에 젖어 오늘날의 밝은 세상이 합병의 은혜에 기인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함부로 구태를 회상하고 도리어 개진의 기력을 상실할 우려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이도상, 《일제의 역사침략 120년》, 경인문화사, 2003, 102쪽에서 재인용

 

합병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한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사》를 편찬한다고 조선총독부는 분명하게 밝혔다. 현재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식민사학을 정설로 떠받들고 있다. 그 원조인 이병도는 해방 직후 너무나 현저했던 친일행적 때문에 위기에 몰렸지만,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체하면서 되살아났다.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 한국사의 태두로 등장했다. 이병도를 사랑하는 제자로 여겼던 쓰다 소키치나 이케우치 히로시가 이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역시 “한민족의 민족성은 강자에 대해서는 굴종적이고 약자에 대해서는 그 반대이며, 거기서 그들의 부리비도의 악질적인 행동이 나왔다”고 흐뭇하게 여기지 않을까? 

더욱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학인들이 자취를 감춘 상황에서 이병도의 사학만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식민사학은 항상 잘못된 정치의 열매를 먹고 성장했다. 그래서 1960년 4·19 혁명 이후로 이병도의 영향력은 한때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제가 패망했을 때, 그리고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졌을 때 이병도의 식민사학도 위기를 맞았다. 식민사관을 청산해야 한다는 열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 사학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다시 부활한다. 또한 1965년 한일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일제청산 문제는 위축되었다. 이병도는 한국사의 부침浮沈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다.

 

국가의 제도 및 기구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조건에서 등장한 억압적인 권력은 그것에 편승한 많은 기회주의자를 양산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떳떳하지 못한 경력을 가진 자들이 과거를 은폐하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좌우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권력의 앞잡이를 자원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8, 267쪽

 

노론당수 이완용이 희대의 기회주의자로서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듯이, 이병도는 이완용의 전철을 밟았다. 이완용의 후손들과 왕래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병도는 이렇게 답했다.

 

전혀 없어요. 다만 내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그의 아들 이병길이 “형님, 형님” 하고 찾아왔기에 꼴이 안 되어 점심을 몇 번 사준 적이 있지요. 그 후 이병길은 전쟁 때 죽었어요. 〔…〕 그 후손들은 미국에 가 있다고 얘기 들었어요. 그리고 한 번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간 일이 있는데 아, 글쎄 그곳에 이완용의 관 뚜껑이 있지 않아요. 이완용이 죽자 나중에 그 후손들이 망국의 주역이라 하여 화가 나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다 불태웠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 관 뚜껑이 거기에 있지 않겠어요? 그래 “아, 우리나라의 창피한 매국노의 관 뚜껑을 왜 박물관에 두냐고” 하고, 문중 사람 사업가인 이모 씨와 의논하여 그 관을 10만 원을 주고 샀어요. 그래 서울에 가져와 불태워버렸습니다.(1984년 대담)

-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 275~276쪽

 

이완용이 고문으로 있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충성을 다해 한국사를 왜곡한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 뚜껑을 불태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마치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수법이다. 오히려 자신과 이완용의 깊은 연관성을 숨기려는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날 뿐이다.

이병도의 한 손자가 21세기에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을 하고, 그의 동생은 문화재청장을 지냈으며, 이완용의 손자인 이윤형은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재산 반환 소송에서 승소한 바 있다. 이런 세상을 지금도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역사의 비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병도에게 우리 역사의 실체를 인정하고, 죽기 전에 죄과를 씻으라고 끈질기게 노력한 최태영은 이병도보다 그의 제자들에게 더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이병도를 끊임없이 복제하면서 제2의 이병도, 제3의 이병도로 퍼져 나가 한국 역사학계의 지배 권력을 향유하면서, 스승을 능가하는 식민사관 청출어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병도 사관’이다. 이른바 ‘이병도 사단’은 한국사를 마음껏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역사 권력이 되었다.

 

 

왜 그들은 식민사학을 받아들였나

 

김용섭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에 겪었던 또 다른 일화를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른 한 번은, 분명치는 않으나, 민족주의 역사학인가, 실증주의 역사학인가에 관하여 검토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교학부장 고윤석 교수도 포함된 네댓 명의 중년·노년의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 야스카즈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768쪽

 

이 사실도 참으로 놀랍다.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인물이었던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해방 후에 예고도 없이 서울대학교 강의실을 찾아왔다. 교학부장을 포함한 네댓 명의 보직교수와 한국 고고학의 태두인 김원룡은 그를 극진히 모시고 나타났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스에마쓰 야스카즈에게 일제 식민사학을 전수한 김원룡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과 교수, 같은 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고, 역사학회 회장, 한국고고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는 해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한국 지부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침략 이론을 만든 황국사관의 선봉장이었다. 한국 역사는 한반도에서만 전개되었는데, 한반도 북쪽은 중국의 한사군이, 한반도 남쪽은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지배한 역사였다고 강변한 인물이다. 또한 일본 천황을 신으로 떠받들면서 고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설을 체계화한 인물 역시 스에마쓰 야스카즈다.

그는 그의 대표작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서 “일본의 한반도 영유(임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자랑이며, 구한말의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은 고대의 복현復現이다. 이는 앞으로 영원히 일본이 한국에 대한 예속을 주장할 수 있는 정신을 인도해준다”고 말했는데, 김원룡은 이런 그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충성을 다했다.

한반도 남부에 고대 일본의 식민통치 기관이 있으려면 삼국이 일찍이 고대국가로 발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삼국사기》의 앞부분, 즉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가짜로 몰아야 했다. 이것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수백 년 뒤에 발견된 광개토대왕비문과 무령왕릉의 기록을 통해서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은 검증되었다. 그러자 김원룡은 ‘원삼국原三國 시대’라는 해괴한 개념을 들고 나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계속 유일한 정설로 만들었다.

김원룡이 발명한 원삼국시대에 대해 역사학자 이종욱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삼국시대라는 구분은 고고학적으로 이룬 시대 구분이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쓰다 소키치가 발명한 식민사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삼국지》 〈한〉 조를 중시한 역사체계가 작동하여 300년 무렵에야 신라와 백제가 정복 사업을 벌여 왕국이 되었다는 견해는 바로 식민사학의 역사체계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실제로 그는 신라와 백제의 초기 국가 형성과 발전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삼국시대론이 한국 고고학계에서 지금도 통용되고 있어 문제다. 특히 국가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도 그러한 시대 구분을 따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들을 보면 신라와 백제는 일찍부터 초기 국가 형성·발전 과정을 거쳤다고 나온다. 신라의 경우 기원후 1세기 중반 무렵부터 이웃한 소국을 병합하기 시작해, 2백 년 정도 지난 뒤에는 진한의 소국을 모두 병합했다. 결국 원삼국시대론은 그러한 정치 발전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시대 구분이 아닐 수 없다. 백제 왕성인 풍납토성과 신라 건국신화의 현장인 나정을 발굴한 지금, 원삼국론은 사학사의 무대로 넘어가야 한다.

-이종욱, 《민족인가, 국가인가》, 소나무, 2006, 170~171쪽

 

김원룡은 한국 고고학을 일제 식민사관에 꿰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신라 유물이 나오면 신라 유물, 백제 유물이 나오면 백제 유물이라 하지 않고, 원삼국시대 유물이라고 하면서 세계에서도 그 유래가 없는 희한한 고고학을 창안했다. 고대 일본의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있으려면 삼국은 원시상태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원룡은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 분야의 개척자로서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은 대단히 높이 평가된다. 특히 그는 1970년대 초에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Proto-Three Kingdoms Period’라는 용어를 주창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이란 영어로 ‘프로토proto(원시, 원형)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서기 300년까지 한반도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다. 문헌사학에서는 이병도가, 고고학에서는 김원룡이 식민사학을 든든하게 지키는 쌍두마차였다. 김원룡이 만든 원삼국시대는 지금도 한국 역사학계, 즉 식민사학계의 정설로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어떤 텍스트도 글자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 각자 나름대로 문장의 맥락context를 해석해야 한다. 위에서 보듯 한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편찬한 사전에서도 김원룡을 극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학이 사학사 무대로 넘어가기는커녕 아직도 한국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데 있다.

김원룡은 한국 고고학계의 주역이다. 지금도 고고학자가 학술원 회원이 되려면 김원룡의 식민사학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고고학자 이선복의 말을 들어보자.

 

일본 고고학에 대한 한국 고고학의 예속은 사실상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특히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고고학을 이식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한국 학계 전반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본 고고학은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국 고고학에 대하여 더욱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느낌이다.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실 우리 학계는 일본을 제외한 외국에서의 고고학의 발전추세를 제대로 흡수할 수 없었으며, 대학에서의 교육은 따라서 상당부분 일제의 시각을 전수하는 과정이었다.

- 이선복, 《고고학 개론》, 이론과실천, 1988, 238~239쪽

 

김원룡을 태두로 한 한국 주류 고고학은 강고하다. 문헌사학자는 이병도가 만들어 놓은 틀, 고고학자는 김원룡이 세운 정설을 따라야 한다. 제국주의 역사학, 제국주의 고고학을 태생적으로 견지한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대일본제국 산하 한국지부 학술원’인 격이다.

앞서 말했듯이 국문학자 이숭녕은 국사학과로 부임하는 김용섭에게 “특히 사학과는 어려운 과다. 조심하라”는 처세술을 전했다. 학문에 정진하길 독려하지 않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의 학풍인 식민사관을 그대로 따르라는 충고를 한 것이다.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김용섭은 선배 교수로부터 “무슨 역사를 그렇게 해!”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 하는 질타를 받아야 했다. 그동안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했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들은 황국사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고, 아예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김용섭은 ‘여기는 아직도 총독부 아래에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서울대학교를 떠나야 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이병도를 필두로 김철준, 김원룡, 한우근, 이기백, 이기동, 노태돈, 송호정 등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제자들로 대를 이으며 역사학계의 권력을 거머쥐고 있다. 대한민국 법조계의 고위직을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이 싹쓸이 한 것과 같다. 서울대학교가 경성제국대학을 이은 관학으로 한국의 대학 가운데 최고 지위에 군림하면서, 한국을 마치 ‘서울대학교 공화국’으로 만들어 온 맥락과 완전히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역사관과 ‘학문 아닌 학문’은 흡사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임에도 한국 역사학계를 손에 틀어쥐었다.

일제는 한국을 침략한 이래 한국사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했고, 한국의 교육 전반을 장악했다. 일제 식민사관과 교육 시스템은 식민지배를 영구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요 무기였다.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해 조선의 상류층 일부를 조선총독부 하급관리로 편입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총독부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며 일제에 충성했다. 일제는 황국사관에 입각해서 주어진 지배가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일부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바로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이다. 이들은 한국의 전통과 역사, 사상과 문화를 저급하게 여기고 민족을 부정하거나 열등감을 조장하는 교육을 시켰다. 자연과 인간, 사물에 대한 주체적인 회의와 사유를 거세했다. 여기서 주입식 교육이 만들어진 것이다. “요컨대, 조선 교육은 이치를 캐는 자를 되도록 줄여야 한다.” 이것이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이었다. 한마디로 천황에 대한 노예 의식을 가슴깊이 새기는 교육이었다.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는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을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일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회적 정체를 야기한 체제였던 셈이다.

서울대학교 법대를 나온 공무원은 지금도 출세가도를 달린다. 서울대학교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신분사회는 해방 이후 해체되기는커녕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온 국민은 이 시스템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학생들은 이 시스템의 부속물처럼 암기하기에만 매달린다.

대한민국 교육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서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어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을 토로한다. 이 시스템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교육의 혁신을 원하지 않는다. 이 교육 시스템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 시스템은 지배체제의 정수다.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늦게 바뀔 부분이 바로 교육이 아닐까? 일제가 패망한 지 68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일제가 만든 교육 시스템이 대한민국을 옥죄고 있다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일제가 역사를 왜곡하고 이를 교육 시스템을 통해 주입해왔는데도, 광복 후 한국은 이를 해체하지 못했다. 게다가 서울대학교는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에 부여한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해왔다. 서울대학교 공화국은 이렇게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일제로부터 광복한 그날, 한국 민중은 환희에 겨워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린아이도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일제에 빌붙은 친일파들은 “우리는 죽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데 역사는 친일파 청산이 아니라, 거꾸로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를 청산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해방 직후엔 “소련 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 놈 믿지 말고, 일본은 돌아온다”는 말이 유행했다. 물론 이 말은 친일파들이 지은 것이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분한 눈물을 삼킨 일본인의 예언은 그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 못지않은,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대목이다.

 

 

식민사관을

관통하는 프레임

 

 

역사를 보는 주체적 관점이 없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란 어차피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이기에 자그마한 사실에만 도전하지 말고 전체를 보는 역사 서술에 뜻을 두어야 한다.” 우물을 깊게 파려면 우선 땅을 넓게 파야 하듯, 역사 또한 전체를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모자이크로 된 미술 작품을 가까이 보면 전체 그림을 보기가 힘들다. 이처럼 우리는 식민사관을 꿰뚫기 위해 우선 세세한 각론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나무를 살펴보기 전에 숲을 먼저 보고, 산을 보기 전에 산맥을 조망하듯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지구의 위성사진을 한번 떠올려 보자. 한반도의 전체적인 지형을 훤히 한눈에 파악할 수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위성고도를 낮춰야만 내가 사는 동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처음에 봤던 한반도의 윤곽이 사라지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느 곳을 여행하려면 그 위치를 알아야 한다. 보통 소축적 지도를 통해 대략적인 방향과 위치를 파악한 후, 여행지 곳곳을 세세하게 안내한 대축적지도를 본다. 지금부터 소축적지도를 보듯, 식민사관이라는 유령을 추적해보자.

 

만일 시어미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닥거리와 같은 종류의 일에 일일이 재판관을 불러와서 그 곡직曲直을 판결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말처럼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보고와도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놓쳐버릴 염려가 있으니 내버려 두는 것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나, 사상계의 변동이나, 국민 생활과 관련된 것이나, 민족의 성쇠소장盛衰消長 등 큰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잘못을 바로잡고 진실을 구하여 조선사학의 표준을 세우는 것이 급무 중의 급무라 할 것이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 47쪽

 

신채호는 역사를 보는 주체적 관점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주체적 관점이란 누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가의 문제다. 그는 역사를 중화주의나 일제 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가장 먼저 경계했다. 침략과 지배의 관점에 서면 반드시 역사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 낳은 것에 정신이 팔려, 정작 이웃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을 놓치는 꼴을 배워서는 안 된다.

모든 학문과 사유는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식민사관을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적하면 그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컨대, 조선교육은 이치를 캐는 자를 되도록 적게 해야 한다”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은 학문과 사유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지배자의 논리였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는 이른바 ‘정설’을 사수하기 위해 기초적인 질문들을 금기시하고, 다른 시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누가, 왜, 어떻게, 언제부터 이런 부조리한 원칙과 풍토를 만들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하나하나 따져보도록 하자.

식민사관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1. 무엇이 식민사관인가?

2. 식민사관의 핵심 프레임은 무엇인가?

3. 누가, 왜, 어떻게 식민사관을 만들었는가?

4. 누가, 왜, 어떻게 식민사관을 재생산하는가?

5. 식민사관의 폐해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6. 어떻게 식민사관을 청산할 것인가?

 

그럼 먼저 무엇이 식민사관인지 살펴보자. 원로 사학자인 숙명여자대학교 이만열 명예교수는 〈식민사관은 어떻게 생겨났나〉라는 글에서 식민사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렇게 일제 어용학자들은 한국사 연구를 ‘한국 침략’이라는 그들의 정책에 맞춰 진행시켰다. 따라서 식민주의 사관은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한국의 역사로 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해 고안해낸 역사관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을 강점한 후 그들은 총독부 내에 조선사편수회’ 등을 설치하고 어용사가들을 동원해 그들의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선사》를 편찬했다. 이때 한국사 관련 책들이 꽤 쏟아져 나왔는데,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서술에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한국사의 상한 연대를 삭감했다. 이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편견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이고 보니 1930년대에 한반도 북단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빛을 볼 수 없었다. 4천여 년 전에 단군이 나라를 창건했다는 것도 한갓 신화일 뿐 근대적 학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배척해버렸다. 결국 그들의 입맛대로 한국의 국가기원은 삼국시대, 그것도 서기 4세기경에야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둘째, 한국사는 이미 고대 때부터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단군을 부인해버린 그들은 기자와 위만이 중국에서 이주한 자들임을 들어 한국사가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이어서 한사군에 의한 지배와 임나일본부에 의한 고대 일본의 한국 지배를 강변했다. 당시 일제는 이렇게 한국 침략의 현재적 명분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셋째, 한국사는 줄곧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수많은 외세의 침략 때문에 자주적인 역사를 전개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들은 우리 역사에 나타난 침략 전쟁을 열거하기에 바빴고, 그 과정에서 외세의 침략만을 강조했을 뿐 그것을 물리칠 수 있었던 한국인의 역량과 문화능력 등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넷째, 우리 문화가 외국의 것을 모방했고, 외국에서 들어왔다는 전파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는 한국문화의 창조성과 자주성을 부인함으로써 한국사의 독자성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우리 역사에서 수치스럽고 어두운 면을 강조하는 대신, 밝고 영광스러운 점은 의도적으로 은폐했다.

그리하여 식민주의 사관으로 구성된 수치스럽고 어두운 한국사는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좌절과 실의를 안겨주었고, 민족냉소주의에 물들게 했다. 식민주의 사관으로 편집된 역사책들이 본격적으로 출간된 1920년대 말부터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이 자기 민족에 대해 자신감을 잃고 자포자기하거나, 민족 멸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민족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잘못된 역사관에 의한 편향된 역사 인식은 이같이 그 폐해가 심각하다.

-이만열, 《우리 역사 5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년, 18~20쪽

 

이만열은 일제 식민사관의 개념과 속성을 일목요연하게 통찰했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한국사 연구를 ‘한국 침략’이라는 그들의 정책에 맞춰 진행시켰다. 따라서 식민주의사관은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한국의 역사로 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해 고안해낸 역사관이다”라는 이만열의 분석은 정확하다. 침략과 지배를 위해 고안한 역사가 제대로 된 역사일 수는 없다. 학문이 아니라 정치이고, 이론이 아니라 폭력이다.

천황 이데올로기는 신성한 천황 아래 수직적인 상하질서를 세워 민중을 천황 지배에 복종하는 노예로 전락시킨다. 그 중간 자리는 천황을 빙자한 침략주의자들이 차지한다. 일제는 한국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의 역사부터 부정하고, 고대로부터 한국은 타 민족의 지배를 받았다고 날조하는 데 주력했다. 일제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한민족에게 열패감과 노예의식을 심으려는 의도였다.

인간은 기억으로 산다. 기억은 정체성의 핵심이다. 언어력을 상실한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억을 상실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잃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정체성은 마음대로 조작하고 지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곧 기억이다. 일제가 한국을 영구히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 역사를 치밀하게 왜곡한 이유다. 사람은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살아가지 과거에서 현재를 살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이만열은 식민사관이 단지 역사를 보는 관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을 규정한다는 점을 특히 경계했다. 김용섭은 식민사관에 대해 “그것은 정당한 한국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제공한 한국사는 황국사관이 반영된, 일본사에 부속된 왜곡된 한국사였으며, 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한 한국사였다”고 정리했다.

 

 

식민사관의 핵심 명제

 

한편 단일한 ‘서양’ 식민주의는 없고, 미국을 제외한다고 해도 명백하게 정의된 ‘유럽’ 식민주의 역시 없다고 본 독일의 역사학자 위르겐 오스터함멜Jrgen Osterhammel은 그의 저서 《식민주의Kolonialismus》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민지는 식민 이전 상태와 결부된 상태에서 침입(정복/ 혹은 정착식민화)을 통해 새로이 만들어진 정치체로서, 지역적으로 격리되어 있으며, 식민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모국’ 혹은 제국의 중심에 대해 외부 ‘지배자’들이 지속적으로 의존성을 띠는 정치체이다.

-위르겐 오스터함멜, 《식민주의》, 박은영 외 옮김, 역사비평사, 2009, 27쪽

 

한편으로 일본 식민주의는 1914년 이전 ‘정점에 이른 제국주의’의 분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일본의 식민주의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식민지 자유성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새로운 유형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바로 그 시기에 가장 극단적 형태에 도달했다.

-위르겐 오스터함멜, 《식민주의》, 박은영 외 옮김, 역사비평사, 2009, 8쪽

 

일제는 식민지배 형태 중 가장 가혹한 식민정책을 실행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 파죽지세로 동쪽으로 쳐들어가던 1941년 6월, 당시 일본의 법무대신 야나가와 헤이스케柳川平助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문제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은 겉으로는 복종하고 있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저항하고 있다. 〔…〕 나는 히틀러 총통의 유태인에 대한 정책과 마찬가지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은 깡그리 어느 외딴 섬에 격리시켜 한 놈 빠짐없이 거세해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불령선인은 없어지고, 앞으로도 못 나올 것이다. 이제부터 대동아 10억의 백성들을 통치해가지 않으면 안 될 황국 일본이 고작 3천만 정도의 조선인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우선 조선인 사상범을 모조리 거세해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히틀러 총통은 이미 유태인 거세를 실행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서쪽에서는 독일·이탈리아 양 민족, 동쪽에서는 야마토大和 민족이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정경모,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이호철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2, 128~129쪽

 

일본의 법무대신이 기자회견에서 “불령선인은 한 놈 빠짐없이 거세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독일의 나치가 똑같은 세력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이때가 1941년이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고작 3천만 정도의 조선인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일제 통치가 막바지로 치닫는 시점에서도 민중의 저항의식은 강렬했다는 반증이다. 군사정권이 민중항쟁이 거셀 때마다 “싹쓸이해야 한다” “발본색원하겠다”고 한 것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한편 1960년대에 어느 일본인 학자가 일제강점기에 주요 역할을 했던 일본인 수십 명을 대상으로 취재했더니, 그들은 모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하여: “일본의 조선지배는 구미歐美류의 식민지배가 아니다. 조선을 일본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 사람을 일본 사람과 같이 천황의 적자로 삼았던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식민지인가.”

창씨 개명 강요에 대하여: “황기皇紀 2600년의 기원절에 천황의 따뜻한 은소恩召에 의해 조선인에게도 일본의 씨를 붙이는 게 허용되었다.”

징병제 시행에 대하여: “징병제 시행도 황민이 되려는 조선인의 노력을 천황이 인정함으로써 조선인도 황군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도상, 《일제의 역사침략 120년》, 경인문화사, 2003, 165쪽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유럽에서는 나치 체제가 철저하게 청산되었지만, 일제는 한국과 일본에서 청산되지 못했다. 김용섭은 식민사관이 가치관 문제이기 때문에 왜곡된 사실의 부분적 시정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곡된 사실의 부분적인 시정이, 한국사의 정당한 인식을 가능케 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는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한 위에서, 새로운 한국사관의 수립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대하는 자세, 문제를 설정하는 데서 가치관을 달리해야 한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536~537쪽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사관을 세우는 일은 가치관을 설정하는 작업이다. 신채호가 강조했듯이, 일본이나 중국의 관점이 아니라 한국의 주체적 관점에 서면 새로운 사실이 보이고,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식민사관의 가장 큰 폐해는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지배자가 주입한 가치에 따라 차별과 억압을 감내하고 체념하게 만든다.

식민사관은 황국사관의 한 부분이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의 계시를 받들어 영원히 통치한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우리 국체國體다.” 모든 일본 국민은 한마음으로 천황의 뜻을 받들고 충성과 효도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황국사관이다. 천황 통치의 정통성과 영원성, 가족국가관에 따라 국민은 무조건 왕 아래 귀속되고, 통합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식민사관은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항일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황국사관에 따라 창조한 한국사 왜곡 이데올로기다. 타민족에 대한 침략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기 때문에 식민사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창조한 천황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일본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의 역사관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일본은 엄연한 천황제 국가다. 독도 문제, 자학사관 극복을 위한 교과서 개정, 일본군 성노예 문제, 강제징용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경제 대국인 일본이 인류사회의 보편적 이상과 양립하지 못하는 한계도 여기에서 나온다.

일본 우익들은 아직도 역사를 조작한다. 일본은 당대 최고의 학자나 지식인들을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을 임의로 조작하거나 왜곡하면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러면서 이를 실증사학이라고 강변했다. 이 전통이 한국 역사학계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한국은 고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식민사관은 ‘지배’라는 침략주의, 즉, 타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말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식민사관 양대 기둥은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이다. 이 두 가지는 이름만 달랐지 같은 내용을 가진 양면이다.

 

‘타율성론’이란 한국사의 주체적인 발전과 한반도 지역의 독립된 역사성 및 문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다. 그 요지는 한반도의 역사가 그 주민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중국, 만주, 일본 등 주변 민족의 자극과 지배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의 경우 소위 일본의 ‘남한경영설’ 및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한반도의 일부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하고, 중세시대에는 당·명·청 등 중국 측 여러 나라들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으나 소위 한일 ‘합방’으로 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며, 따라서 ‘합방’은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의 한·일 관계로 되돌아갔다고 하는 궤변으로 ‘합방’을 합리화하려 한 것이다.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청년사, 1994, 22쪽

 

사람은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될 때 가장 불행하다. 그래서 사람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를 원한다. 타자를 지배하려는 자는 항상 폭력에 기초하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람이나 민족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교육사상가 이오덕의 말을 들어보자.

 

무릇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여 아무리 좋은 정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침략밖에 아무것도 될 것이 없다. 더구나 점령당한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의 말글이 아닌 남의 말글을 본의 아니게 익혀야 한다면 거기서는 벌써 참담한 문화의 종속과 지배의 관계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지배당하는 쪽이 아무리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속임수요, 그 겨레의 앞날은 죽음밖에...